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시우스 1세 (문단 편집) === 테살로니카 폭동과 학살(390년) === 이에 비하여 테살로니카에선 정 반대의 잔인무도한 행동을 보여줬는데, 일단 원인은 보테리크라는 장군이었다. 당시 보테리크는 아름다운 미소년 노예를 소유했는데, 콜로세움에서 전차를 모는 전사 하나가 이 미소년 노예를 건드렸다 한다. 보테리크는 그자를 투옥하고 심문했는데, 이 전사가 현대로 치면 스포츠 스타나 다름없었던지라 폭동이 일어났다. 정확히는 여러 차례 불만이 쌓여왔다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탈리아 전쟁으로 병력이 빠진 상황인지라 보테리크와 부관들은 민중에게 살해당하고 토막나 온 거리에 끌려다녔다. 테오도시우스가 이 사건을 두고 판결을 내렸는데 그 내용이 지금까지 보였던 행보와는 전혀 달랐다.[* 사실 많은 역사적 인물이 그러하듯이 정확히는 선과 악이 혼합된 인물일 것이다. 애초에 [[아리우스파]]를 숙청하기 위해 꽤나 잔혹한 음모를 많이 꾸며야 했다.] 군중을 기념공연을 해주겠다 하여 경기장에 모이게 하여 거기서 학살하였다.[* 대략 7천에서 1만 5천이 죽었다고 한다.] 두 아들 중 하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한 상인이 있었는데 병사는 두 아이를 모두 죽였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병사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고 한다. [[테살로니키]] 학살의 참상을 듣고 대노한 [[밀라노|메디올라눔]](밀라노의 옛 지명)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메디올라눔을 방문하고 그곳의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러 가던 황제를 내쫓아버렸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는 남루한 옷을 입은 채로 무릎을 꿇고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후대의 [[카노사의 굴욕]]에 비견하기에는 어렵다. 주교는 황제의 권력을 넘볼 수 없었고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와 가까운 사이였다. 역시학자들은 정말로 교회의 권위가 높아서 일어난 굴욕이라기보단, 학살로 인기가 추락한 테오도시우스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황제의 신앙심과 겸손한 면모를 부각시킨 행동이었으리라 생각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